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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변선생님_04

 

***

 

주말 자습을 끝내고 온 저녁에 쓰러지듯 잠에 빠져있다 방금 전에야 일어났다. 독서실에 가자는 이성경의 문자가 와 있었지만 만나면 자신이 어떻게 남주혁을 만났는지부터 고백한 날을 육하원칙에 맞춰 이야기를 풀어낼게 뻔히 보여 정중하게 답장을 보낸다.

 

 

「ㄴㄴ도서관 갈 거임 남친이랑 가」

 

 

침대에서 뭉그적대다 창틀에 얼굴을 올리고 밖을 쳐다본다. 창문을 열자 태양이 갑자기 와르르하고 빛을 쏟아내는 바람에 눈앞이 일렁인다. 적당히 차가운 공기에 적당히 따뜻한 햇볕이 참 마음에 드는 날씨이었지만 안타깝게 오늘은 도서관에 갈 예정이었다. 추위에 온도가 낮아진 몸이 어서 창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질끈 묶고 도서관에 갈 준비를 시작한다.

 

*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기도 했고 시험 3주 전이라 그런지 주말 도서관은 자비 없이 꽉 차 있었다. 교과서로 가득 채운 가방을 고쳐 메고 자료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

 

 

"진짜 많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복도를 걷는데 멀리서부터 사람이 많은 게 보인다. 습관처럼 가방끈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사람 사람 사람, 넓은 도서관이 온통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제 막 포기하고 독서실에 가겠다고 이성경한테 문자를 보내려는데 딱 자리를 발견했다. 뭐든 항상 그만두려 하면 이루어진다, 치사하게 빨리 좀 찾아오지 말이다. 내가 찾은 건 빽빽하게 찬 사람들 사이에서 자리를 떠나려는 사람과 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 …."

 

뭐가 잘 안 풀리는 건지 빨간 입술을 쭉 내밀곤 삐죽댄다. 선생님은 앞자리 사람이 바뀌든 말든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타자를 쳤다가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또 한참 가만히 있다가 다시 타자를 친다. 선생님을 아는척할까 했는데 민망할 것 같기도 해서 조용히 가방에서 문학책과 필통, 그리고 학생들의 기본 템인 포스트잇을 꺼낸다.

 

 

 

 

"… …."

 

 

선생님이 앞으로 밀려나온 커피캔을 이리저리 돌려보곤 작게 웃는다. 커피 캔에는 내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색, 사이즈의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쪽지와 커피를 보낸 사람을 쳐다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학생들 안 마주치려고 멀리 왔더니 딱 걸렸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선생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공부하러 왔지."

 

"지금도 하기 싫은데 선생님 대단하세요. "

 

 

 

그러니까 열심히 해,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며 머리를 꾹 눌러 책을 보게 한 뒤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지루하게 문학책만 쳐다보는데 방금 전과 같은 쪽지가 모서리에서부터 찔끔찔끔 내려온다. 말괄량이 같은 글씨체 아래 반듯하고 꾹 눌러쓴 듯한 글씨가 추가되어있다. 종이를 보고 선생님을 쳐다본다. 어쩐지 선생님의 목이 조금 빨개진 것 같다.

 

 

「집중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그러는데 번호 좀 주실래요?

 

→010-1234-5678 한국사 공부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나는 종이를 예쁘게 접어 체육복 주머니에 넣는다.

 

 

**

 

 

슬금슬금 밥 달라는 아우성이 들려오자 야쿠자 집단처럼-1인 10역이 가능한 덩치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매점으로 내려왔다. 방금 전 밥 먹으러 간다며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도망치듯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데 매점문을 열자 자리에서 새우탕을 드시고 있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점심 드시러 간다고 하셔서 10만 원짜리 런치 드시고 계실 줄 알았는데 1500원짜리 새우 탕이네요."

 

"시끄러워"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차림도 후줄근하다. 깨끗한 흰색 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학교에서는 잘 끼지도 않는 검은색 안경까지 꼈다. 이렇게 보니까 3년 전 공부할 거라며 배를 긁던 오빠가 생각난다. 물론 선생님은 저렇게 입어도 멋있긴 하다. 잘생겼으니까. 선반에서 컵라면을 골라 계산하고 선생님 앞자리에 앉으니 자신의 라면을 더 가깝게 붙인다.

 

 

"안 뺏어 먹어요"

 

"시끄러워, 아는 척하지 마. 저리 가"

 

 

사실 새우탕이 조금 먹고 싶긴 했다. 애꿎은 새우탕 세 글자만 뚫어져라 쳐다보니 안쓰러웠는지 선생님이 그릇을 앞으로 들이민다.

 

 

"아 해."

 

"앗싸"

 

"한입만 줄 거야"

 

"감사합니다"

 

 

텍스트로 쓰니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은데 첫 번째의 저 "아 해"라는 어린아이 할 때 아해가 아니라 모음 아에이오우 중에 '아'를 하라는 뜻이다. 아무튼 선생님이 친히 젓가락으로 집어 식혀주고 먹여주기까지 한다. 꼭 공주님이 된 것 같다. 한껏 입안에 들어온 면을 씹으며 내 라면을 먹을 준비를 마친다.

 

 

"선생님, 날씨도 좋은데 점심 먹고 산책해요"

 

"공부해"

 

"이렇게 날이 좋은데"

 

"말 끝까지 해야지"

 

"요"

 

"까불어, 그럼 5분만 걸어"

 

"앗싸 빨리 먹을게요"

 

"천천히"

 

 

선생님은 화법이 독특한 것 같다. 알겠으면 알겠는 거지 꼭 아니라고 한 다음에 알겠다고 한다. 나는 먹던 라면을 정리하고 카운터에서 바나나우유 두 개를 계산한다. 빨대를 꽂아 선생님께 건네니 고맙다며 받아든다. 도서관 건물에서 벗어나 작게 마련된 공원을 산책하듯 걷는데 기분이 둥실 떠오른다. 날이 따뜻하게 풀리자 소풍 나온 가족들도 보이고 복슬복슬 하얗게 털이 자란 강아지가 깡깡대며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강아지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경로를 바꿔 우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강아지"

 

 

남들이 들으면 선생님이 강아지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잔뜩 들떠서 달려오는 강아지를 받아안자 멀리서 주인처럼 보이는 아이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품 안에서 숨을 고르는 아이를 쓰다듬어주는데 털이 비단 같다. 주인 아이가 참 부지런한가 보다. 한참 쳐다보며 쓰다듬어주다가 아이에게 건네주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선생님을 본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가있다. 귀여워 선생님-.

 

 

***

 

 

산책을 다녀온 후 공부를 하러 돌아왔는데 문학책을 보니까 졸음이 쏟아진다.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몇 번이고 붙잡다가 결국 팔을 포개어 엎드린다. 다음부터는 혼자 도서관에 오면 안 될 것 같다고 다짐하며 잠에 든다.

 

.

 

 

눈뜨고 보니 탁상시계가 벌써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도서관에 온 지 5시간이 넘었는데 이때까지 한 거라곤 문학 3작품 읽은 것과 라면 먹고 산책한 것 밖에 없다는 소리다. 갑자기 몰려오는 자괴감에 문학책을 집어넣고 한국사 책을 펼쳤다. 대충 보니 도서관에 사람들도 빠진 것 같고 선생님 공부도 끝나가는 것 같으니 조금 이따 공부를 도와달라고 해야겠다. 제일 먼저 교과서를 펼치고 문제집의 같은 단원과 필기하던 노트를 펼친다. 여기저기 삐죽대며 형광펜이 엇나가있는 게 부끄럽다. 오늘은 필기를 예쁘게 해야겠다. 지금은 일제에 대항한 민족들에 대해 공부하는 중인데 헷갈리는 게 너무 많다.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고, 이마를 짚으며 차근차근 암기하기 시작한다.

 

 

 

"그 부분 헷갈리지"

 

"아..!깜짝이야

 

...네, 다 같은 말 같아요"

 

"나도 그거 공부할 때 제일 힘들었어. 어쩔 수 없다, 그냥 외워"

 

"아..."

 

"옆으로 와 봐. 잘하고 있는지 보자"

 

 

 

또 친절하게 의자까지 끌어준다. 와르르 가방 안에 물건들을 쏟아 넣고 종종걸음으로 옆자리에 앉는다. 선생님이 필기한 노트를 가져가더니 몇 장 뒤적여보고는 깔끔하다고 칭찬해준다. 선생님은 시력이 많이 안 좋으셔서 안경을 끼시는 듯하다. 친구들은 내 글씨체에 이름까지 붙여줬다-말괄량이 글씨라고-. 멋쩍게 이마를 긁으며 감사합니다. 하자 이번에는 교과서를 뺏어가신다. 한국사 필기는 얼마나 빽빽한지 교과서 옆 귀퉁이가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아주 다채롭다.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듯 씩 웃더니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별표시를 짚는다.

 

"이거랑 이거는 외워야 해. 이 부분은 앞 페이지에 배경이 나와있으니까 보고"

 

 

이거 다른 사람이 보면 시험문제 유출로 잡혀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자신만 모르는 듯 문제를 줄줄 흘리던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멈춘다. 그리곤 한쪽 눈썹을 찍 올리고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한다.

 

"아, 비밀이야"

 

 

방금 전 신민회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던 선생님이 흘리듯이 '서술형 나오니까 외워' 라고 한 말이 생각난 모양이다. 비밀로 하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미심쩍은 듯 쳐다보고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오늘 아침으로 계란 프라이를 했는데 반숙이 되었다라던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털을 빗겨주는데 한 뭉치가 빠져나왔다 이런 말들 말이다. 강아지라는 말에 솔깃해 다시 묻자 무미건조하게 응하고 대답한다.

 

 

 

"…사진 보여줄까?"

 

"네!"

 

 

공부할 때보다 더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니 웃긴가 보다. 푸스스 웃으며 휴대폰의 사진첩을 찾아 보여주는데 아까 공원에서 본 아이와 같은 새하얀 털을 가졌고 조금 더 작은 몸집의 아이가 선생님의 가슴팍 위에서 잠든 사진이었다. 조그마한 얼굴에 눈코입이 어떻게 오목조목 모여있다. 감은 눈은 대충 그은 직선 같았고 코는 동글동글 까만 콩이 생각났다. 앙 다문 입술은 시옷자 모양이다. 사진을 확대했다가 축소했다가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뺏어가듯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다른 사진을 보여준다. 이번에 사진 속 그 아이는 분홍색 레이스핀으로 머리를 묶었고 귀 끝에 기른 털은 예쁘게 땋아져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항상 모니터 펫만 키운지 몇 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렇게 예쁜 강아지를 기르는 선생님이 부러워졌다. 나도 예쁘게 꾸며줄 수 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해줬어요?"

 

"아니, 집에 갔는데 누나가 저렇게 해놨어"

 

"선생님 누나 있으시구나"

 

"아… …. 비밀"

 

"되게 의외인 부분이 많은 것 같네요"

 

"나는 너희가 내 성격 나쁜 줄 아는 게 더 의외다. 나 밖에서 그런 소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맨날 인상 쓰고 화내고 생기부로 협박하니까 무서워하죠"

 

"노트북으로 나이스 들어갈 수 있는 거 알지"

 

"죄송합니다. 우리 학교에서 선생님이 제일 좋으신 분이세요"

 

"그래야지"

 

 

또, 또 생기부로 협박한다. 이쯤 되면 생활기록부를 쓰려고 교사가 된 것 같다. 선생님은 포슬포슬한 웃음을 흘리며 불쑥 휴대폰을 들이민다.

 

 

"볼래?"

 

"이게 뭐예요?"

 

"이름 부르면 어디서 쏙 튀어나오는 거 찍었어"

 

"볼래요!"

 

 

선생님과 나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휴대폰을 놓고 영상을 재생하는데 스피커로 강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나온다. 도서관 내에서 하는 방송인 줄 알고 주위 사람들이 두리번 거리다가 우리를 흘긴다. 둘 다 굳어서 뻣뻣하게 마주 보다 푸스스 하고 웃어버린다. 가방에서 하얀색 이어폰을 연결하고 한쪽씩 나눠끼자 선생님이 강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강아지는 좋겠다 저런 목소리로 불러주니까

 

 

'또또야-'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자 어디선가 쏙 튀어나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카메라에 코를 박고 킁킁댄다. 정말 너무 귀여운데 도서관이라 차마 입 밖으로는 못 내고 주먹만 말아 쥔 채 영상을 본다. 누워서 손장난 치는 또또의 발바닥은 아직 색소가 덜 올라와 연한 분홍빛을 띠고 있다. 결국 입 밖으로 끙 하는 소리를 뱉자 선생님이 참지 못하고 웃는다. 민망한 마음에 허벅지만 퍽퍽 치는데 눈앞으로 휴대폰을 들이밀며 계속 강아지 사진을 보여준다. 계속 놀리는 선생님한테 참지 못하고 하지마쎄여! 하고 이상한 말투로 소리를 지르자 더 크게 웃는다. 나쁜 사람

 

"알겠어 ㅋㅋㅋㅋㅋ아 웃기네"

 

"아 진짜… 맨날 이상한 사람 만들고"

 

"너 때문에 공부 반도 못했어, 빨리 책임져"

 

"선생님도 저 공부 못하게 하셨거든요"

 

"잠깐만 시간이 왜 이래?"

 

"미친, 쌤 시간이 왜 이래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리고 미친이 뭐야 말 똑바로 해야지"

 

"이런 정신 나간… …."

 

"못 살아 진짜"

 

 

분명히 자고 일어나서 선생님이 줄줄 흘려주는 문제 받아먹고 강아지 사진 나눠본 것밖에 안 했는데-결국 놀았다는 소리- 벌써 6시가 다 되어간다. 이러면 이제… ….

 

 

"배고프다"

 

 

배가 고파질 시간이다. 도서관 마감시간까지 버티려면 지금 나가서 배를 채워야 남은 시간이라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선생님을 툭툭 치고 밥 먹으러 가자고 말하자 또 한번 웃는다. 볼수록 내가 알던 사람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나쁜 사람이지만 참 웃음이 헤픈 사람이다.-그리고 멋있다.-

 

 

"뭐 먹을래"

 

"아 고기 먹고 싶다."

 

"가자"

 

"저 돈 없어요! 지갑에 꼴랑 8천 원 있어요"

 

"내가 있잖아. 난 카드도 있고 현금도 있으니까 가자"

 

"아 얻어먹기 죄송한데"

 

"표정부터 바꾸고 말하지? 그리고 커피랑 바나나 우윳값이라고 생각해"

 

"커피는 1+1이었고 바나나우유는…피 같은 용돈이었으니까 감사하게 얻어먹을게요"

 

"많이 먹지 마"

 

"… …."

 

"장난이야"

 

 

도서관을 벗어나 아무 계획 없이 걷는데 한참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근처 고깃집에서 냄새가 풀풀 날려온다. 홀린 것처럼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치는 데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학생들인가?" 

 

"네? 아 저는… …."

 

"네 곧 있으면 시험이라서 같이 도서관 왔어요"

 

 

뻔뻔한 사람이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상차림을 준비하는 아주머니께 생글생글 웃기까지 한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의미 없이 입술을 쭉 내밀고는 다른 곳을 쳐다본다. 저거 방금 귀여운 척 한 건가? 독특한 사람이다.

 

"남학생이 붙임성도 있고 예뻐서 서비스 더 얹었어

 

용돈 털어서 온 걸 텐데 많이들 먹고 가.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

 

"감사합니다"

 

 

둘 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온 게 먹힌 듯하다. 선생님이 수트라도 차려입고 왔으면 아는 척 안 하려 했는데 너무 익숙한 패션이라 친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친해졌다- 불판 위로 생고기를 올리자 맛있는 소리가 난다. 언제 익을지 불판 위에 올라간 고기를 쳐다보는데 위에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 익겠다. "

 

"깜짝이야! 예고 좀 해주세요"

 

"3초 있다가 말 걸게, 이렇게?"

 

"네, 심장이 하루에 다섯 번은 떨어지는 것 같아요"

 

 

"잘생긴 내 얼굴 덕분에?"

 

"아 진짜!"

 

"알겠어 알겠어 ㅋㅋㅋㅋㅋ"

 

"빨리 잘라주세요. 고기 타는 것 같아요"

 

"아직 빨간데? 말 돌리네 반장"

 

"아 몰라요 제발… …."

 

"놀리는 거 재밌네"

 

 

이 사람, 사람 놀리는데 익숙한 것 같다. 내 친구였으면 벌써 맞았다 이 변백현아. 얼굴에서 푹푹 열이 올라오는 걸 보니 또 빨개진 모양이다. 더워서 그런 거라고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하니 이번에는 테이블 위로 와르르 쏟아져서는 끅끅댄다. 참나… 다 익은 고기를 골라 입안으로 쏙 집어넣는다. 한 번도 안 와본 집인데 고기가 맛있다. 앞으로 여기만 와야겠다.

 

 

"이모 계산이요ㅡ"

 

 

학생이라고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해버려서 현금 결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5만 원짜리 깨는 거 진짜 아까운데. 밖으로 나오며 가게 안에 있던 방향제를 칙칙 뿌리곤 선생님한테도 흔들어 보이자 뿌려줘ㅡ 하고는 양팔을 벌려 빙글빙글 돈다. 아직 덜 빠진 고기 냄새에 같은 방향 제향이 나니 묘한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고기 냄새 풀풀 풍기며 도서관에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민폐다.

 

 

"선생님, 우리 옷에서 고기 냄새나요"

 

"아… 그러면 짐 싸서 카페라도 갈래? 9시 전에 데려다줄게"

 

"그럼 오늘만 실례할게요"

 

 

 

선생님은 눈치가 참 빠른 것 같다. 근처에 카페에서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들떠 재촉하니 알겠다며 일부로 천천히 걷는다. 방방 뛰며 화를 내자 큭큭대며 달려온다. 자료실에서 최대한 빠르게 짐을 챙겨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하다. 오늘 한 공부라곤 문학 3작품, 한국사 반 단원 밖에 없다. 이번 시험은 잘 쳐야 하는데 큰일이다.

 

 

"저는 어…초코딸기 케이크 하나랑 아메리카노 주문할게요"

 

"캬라멜라떼까지 같이 계산해주세요"

 

"뭐 하시는 거예요!"

 

"바나나 우윳값"

 

 

케이크와 커피까지 딱 8000원을 채우고 돈을 건네려는데 선생님이 손으로 막고 카드를 건넨다. 그놈의 바나나 우윳값은 갚은 지가 언젠데 이러는지 모르겠다. 남한테 받아먹는 게 익숙지 않아 안절부절못하자 가만히 있으라며 혼낸다.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제법 무서운 모습이다. 나는 삐죽이며 자리를 찾아간다.

 

 

***

 

 

"아ㅡ 힘들다"

 

 

케이크를 푹푹 떠먹으며 공부한 지 한 시간이 넘어간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나는 심심하다. 기지개를 펴며 뭉친 근육을 푸는 척 선생님을 보는데 역시 노트북에 코를 박고 집중하고 있다.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하는 건지 쳐다도 안 본다. 아 심심해, 나는 팔을 뻗고 그 위에 머리를 올린 후 눈을 감는다.

 

.

 

"일어나, 가자"

 

 

미쳤다. 잠깐 눈 감는다고 했던 게 잠들었나 보다. 노트북의 전원을 끄며 팔을 툭툭 치는 선생님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방금 전 나는 선생님께 자는 모습을 하루 만에 2번을 보여줬다. 선생님 레드썬, 잊으시길 바랍니다. 민망함에 가방 속으로 물건들을 쑤셔 넣으며 빨리 나가자고 쿡쿡 찌른다. 방실방실 웃으며 왜- 집 가서 자게? 하고 놀려온다. 오늘 4천 번은 놀림당하는 것 같다. 나는 선생님에게 빨리 가자고 팔을 붙잡고는 가게 밖으로 나간다. 도서관에 차를 주차해놓았다는 말에 컴컴해진 밤을 배경으로 선생님과 걷는 길이 예뻤다. 이제 꽃 봉우리들이 하나둘씩 꽃들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바람이 불면 제법 꽃 냄새가 나기도 했다. 봄의 밤을 느끼며 후드집업 지퍼를 턱 밑까지 올린다. 두 번째 보는 선생님의 차를 단번에 찾아내 문 앞에 서있자 선생님이 멀리서 차 키로 잠금을 풀어준다. 정말로 멋있다. 트레이닝복이 저렇게 잘 어울리는 것도 멋있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회색 외제차를 운전하는 모습도 멋있다. 집과 도서관은 민망할 정도로 가까워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집 앞까지 도착했다. 나는 금방 도착해버려서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어… 안녕히 가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반장, 그리고 한국사 모르는 거 있으면 그 번호로 연락 주시고요"

 

"아 선생님 진짜!"

 

"ㅋㅋㅋㅋㅋㅋㅋ 어서 들어가, 걱정하시겠다"

 

"감사합니다. 내일 봬요"

 

"그래 들어가"

 

 

 

미친 건지 반장이라는 말이 애칭처럼 들린다. 그 다음으로는 도서관에서 커피와 함께 보낸 쪽지를 갖고 놀리는 말이 따라왔지만 아랑곳 않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멀어지는 회색 차가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다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선다.

 

 

epilogue1.]

 

 

​<<백현쌤

​도서관에서 번호 물어본 사람인데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ㅎㅎ

​오후 09:32 ​내일 봬요

 

안녕하세요 도서관에서 번호 준 사람인데요

오늘 커피랑 바나나우유 감사했습니다ㅎㅎ

내일 봬요. 숙제 꼭 해오시고 ​오후 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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