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미스틱


한국사 변선생(님)


***
 


고3이라니..!내가 고3이라니..!를 외치며 올라온 첫 날은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3년동안 얼굴 맞댄 친구들이 많아 안심이 되었지만 수능을 앞둔 압박때문인지 3학년의 첫날은 무거웠다. 

 

 

 

 

"한국사 변백현이래"

"뭐?이런 미친"

"1년동안 조용하게 살자"


아 참, 이 친구는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할 예정이니 이름을 알아두는게 좋을 듯 하다. 이성경. 고1때부터 함께한 영원한 문과 동반자-이자 여고 교내 유일한 체대입시생-이다.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이름때문에 혹시 부모님이 기독교 신자냐고 물었다가 뒤지게 맞을 뻔 했다. 아무튼 성경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생각보다 큰 충격을 선물했다.


변백현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그렇듯 다정하고 부모된 마음으로 챙겨주시지만 그 일반화를 깨는 사람들이 딱 두 명 있었으니 한 명은 한국사 변백현. 또다른 한 명은 수학과 김태연이었다.
그래, 김태연 선생님은 여자라 덜하다 쳐도 변백현은 정말 악질중에 악질이었다.-근데 수업은 또 잘해서 더 화가 난다는거다-.툭 치면 울고 웃는 여고생들의 감성에 변백현 선생님은 정말 단 한구석도 맞는부분이 없었다.


처음에 잘생긴 얼굴때문에 다가갔다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눈물흘리며 돌아온 여학생이 한 둘이 아니어서 소문의 변백현은 곧 악마의 변백현으로 탈바꿈했다.

오죽하면 김태연선생님과 사내연애 한다고 소문까지 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상담실에서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시험지를 채점하다 욕하는걸 들었다고 누군가 했던 말이 와전되었던걸로 결론났지만.


아무튼 그런 변백현이 올해. 하필. 고3 담당으로 올라와버리니 우리의 유리멘탈 여학우들은 멘탈이 와장창 깨져버린거다. 주섬주섬 깨져버린 멘탈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 후 다시 자리에 앉자 호들갑스레 성경이 말을 걸어왔다.




"아, 배고파!"

"...."

"매점갈래? 가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성경은 여고의 유일한 체대 입시생이었다.



***


이래서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한다는거다. 안먹을것처럼 말해놓고 는 입에 빵을 잔뜩 집어넣으며 교실로 돌아오자 친구들의 책상에 한국사 책이 올려져 있는게 아닌가. 물론 모두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행복한 금요일의 1교시부터 한국사라니,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아 한국사책을 찾는데



"아"

"?왜"

"ㅋㅋ...나 책 놔두고 왔..."

"미친 빨리 옆 반 가서 빌려"

"아..아는 애들 없는데"

"한국사 변백현이라고 말하면 다 빌려주더라.빨리 다녀와"




세상에. 얼마나 악질이길래 변백현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이에도 책을 덥썩 빌려준다는건지 생각할 수록 대단한 사람인듯했다. 그래 첫 날부터 찍히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며 옆반으로 가 찔끔찔끔 뒷문을 열었다.


"뭐야. 문닫아"


아 지져스. 문여는데 집중한다고 교실 안을 못봤던거다. 참 웃기게도 옆 반이라고 열어제낀 문 안에는 변백현이 들어가있었다. 반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걸려있는걸 보니 담임으로서는 꽤 괜찮은 사람인듯하다. 아무튼 쫒겨나듯 문을 닫고 그 옆반으로 가서 뒷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교실 안을 확인했다- 그러자 뒷자리에 앉은 생글생글하게 생긴 아이가 돌아보며 말을 해왔다.

 

 

(왼쪽 아이가 뒷자리에 앉아 말을 건낸 친구이다. 오른쪽 친구는 무섭게 생겼는데 놀랍게도 유아교육과를 갈거라고 했다)


"찾는 사람있어?불러줄게"


아 이제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같았다. 이런 미소천사가 학교에 있는 줄 몰랐다. 진작 알았으면 친해지는거였는데. 아무튼 힐링미소에 치유받으며 용건을 말하자 아이의 얼굴이 곱게 찌푸려진다.


"1교시가 한국사인데 변백현이래. 근데 책을 못갖고와서 좀 빌릴...수 있을까?"

"아 세상에. 잠깐만"


아이는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 건내줬다. 한국사 라고 적힌 타이틀 아래에 반듯한 글씨로 '정휘인'이라 쓰여있다. 미소천사 이름이 정휘인이구나.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반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자마자 분홍색 포스트잇을 꺼내 편지를 쓰기시작하자 그 꼴을 보던 성경이가 인상을 잔뜩 쓰고 말했다.

"연애편지쓰니?"

"응 옆옆반 정휘인. 웃는거 예쁘더라"

"세상에"

못볼거라도 본 듯 더 찌푸려진 미간을 꾹 눌러주자 소름돋는다며 팔을 비빈다. 안타깝게도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아직 사랑이 찾아오지 않았을뿐. 눈물이 앞을 가린다. 1학년 겨울방학에 애매하게 끝낸 근대사부분을 펼쳐 다시 읽고있는데 하나도 못알아보겠다. 청산리대첩은 뭐고 봉오동전투는 또 뭐람. 공부를 좀 할 걸 그랬다. 한참 책을 읽고있는데 문이 참 거칠게 열렸다. 변백현이 문을 열었나보다.


"217페이지 펴고 책 없거나 빌려온 사람은 일어나"


교실 문에서 교탁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저 말을 걸어오면서 하는지 디테일한 페이지 수에 전날 대사 암기라도 한듯싶다. 그나저나 책 안갖고온 혹은 빌려온 사람이 나뿐이 아니라는건 안심해도 되는 걸까.


"너희는 고3이라는게 책 하나 똑바로 못챙겨? 이래서 수능때 학교 이름이나 제대로 쓰겠어? 정신 안차리지"


혼나고 있을 때 속으로 선생님 말에 토달고 있으면 시간이 정말 잘 간다. 속으로 학교이름은 제대로 쓰는데요 선생님.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아니 옆자리 친구부터 서있는 친구들 전체가 나빼고 하나 둘씩 눈물을 터뜨리는거다. 나도 울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자리에 앉으라는 말에 슬쩍 앉았다. 앉을때 고개를 숙이고 죄송한 척 하고있으면 찍힐일도 없,


"넌 뭔데 고개 숙이고있어. 말 같지 않지?"


있나보다 하하.


"아니.."

"됐다. 넌 좀 이따 따라오고 다들 책 펴"


자기가 펴라고 한 페이지는 삼만년 전에 펴져 있었는데 또 펴란다. 멍청한 사람. 근데 고개숙였다고 끌려내려갈 정도로 혼날만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아 멍청한 사람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괜히 그 날 수업은 더 열심히 들었다. 안하던 발표까지 하면서 잘보이려고 애썼는데 마음이 통했는지는 모르겠다.


.


"뭘 잘못한것 같아"


이건 마치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하는 여자친구의 고전적인 질문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게 이렇게 고함까지 들어가며 혼나야하는 일인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원하는 대답을 해야 풀려날 것 같았다.


"....잘모르겠어요"


근데 진짜 모르겠단 말이다. 어정쩡하게 아닌 답 말했다가 틀렸다고 지적받는게 듣기 싫어 한 말에 심기가 뒤틀린가보다. 한가지 직감적으로 느낀건 1년이 힘들것같다는 것이었다. 잔뜩 뒤틀린 미간으로 봐서 선생님은 나를 마음에 안들어 하는 것같다.


"어줍짢게 반성하는척, 그게 제일 싫어 난. "


뒤죽박죽 섞인 문장이 어지러웠다. 말 좀 똑바로 해주지, 아무튼 이 방법은 변백현 선생님한테는 안 통하는 듯 하니 패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차라리 다른 애들처럼 울던가"


변태인가? 아니면 뭐 여고생 울리는 걸 취미로 하나. 내 생각에 이 사람은 정복욕이 강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뭐 지금이라도 울어야 화가 풀리려나. 사실 눈물도 안나오는데



"아무튼 들어가봐. 넌 지켜본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교실로 가는 발걸음이 젖은 솜마냥 무겁게 느껴졌다. 1교시부터 기운이 빠지니 배가 고파 계단을 오르며 이성경에게 매점이나 가자고 문자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 답장이 온다.


「나 벌써 와있음 내려와ㅇㅇㅇ」



.




강렬한 첫인상에 다시 돌아온 한국사 시간은 생지옥에 떨어진 듯 한 기분이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반장 인사해"

"차렷. 경례"

"잠시만. 네가 반장이야?"


걸리면 1년동안 생고생을 사서 한다는 한국사 전담 쫄병. 학급 반장이 되어버린 탓이다. 둘째는 다들 알다시피 나를 싫어한다는 것. 아 참, 그리고 선생님은 치사하게 생기부로 협박을 한다.


50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채로 교과서에 시선을 내리꽂는다. 일주일에 두 번, 그 날이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다.



×××

 

 

 

 

'STORY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현]한국사 변선생님 04  (0) 2017.05.07
[백현]한국사 변선생님 03  (0) 2017.05.07
[백현]한국사 변선생님 02  (0) 2017.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