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미스틱

 

한국사 변선생님_03

 

***

 

 

3학년의 첫 모의고사 날이다. 고3 3월 모의고사 성적이 수능 성적과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시하지는 못하는지 다들 아침부터 분주하다. 3월의 바람은 이렇게나 좋은데 정작 우리들은 멸치처럼 그물 안에 빽빽이 갇혀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4층 높이의 창문에서 뛰어내려 미친 이처럼 봄을 느끼고 싶지만 사회적 일탈자로 낙인찍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한숨과 함께 컴퓨터용 사인펜과 검은색 제도 샤프를 꺼내 나란히 놓는다.

 

 

 

"모의고사 다들 한두 번 쳐본 거 아니지? 5분 전 입실 명심하고 학교 번호 헷갈리지 말고 잘 치자."

 

 

 

다정한 여선생님의 충고와 함께 자유시간을 갖게 된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괜히 문학책을 뒤적여 나올만한 지문을 찾아봤다. 떠밀려 읽게 된 작품은 나희덕 시인의 '땅끝'이었다. 작품은 시인 특유의 잔잔한 어투와 절망에 대한 역설적 희망이 단단하게 버무려져있는 내용이었다. 뭐, 평소에 나희덕 시인을 좋아하기도 했고-사실 대부분의 문학 작가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무튼 작품 하나를 읽고 나서부터는 지루해져서 엎어져있는 성경이의 옆자리에 앉아 종알댔다. 어제 남주혁 운동하는 모습 훔쳐본 이야기라든가 버스를 탔는데 바로 옆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남자가 잘생겼었다 와 같이 지극히도 일상적인 내용으로 말이다.

 

 

 

"책상 위 전부 치우고 맨 앞줄은 OMR 카드랑 문제지 다 나눠줄 때까지 넘기지 마. 시험 잘 쳐라"

 

 

 

입실 5분 전, 감독관 선생님이 시험지와 OMR 카드가 잔뜩 쌓인 서류봉투를 들고 교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우르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다들 자리에 찾아 앉고 맨 앞자리의 책상 위에는 하나둘 시험지들이 쌓여갔다. 원래 시험 칠 때 떠는 성격이 아닌데 아침에 듣고 온 소리-​시험 잘 치고 와 딸, 오늘 치는 시험이 수능이라 생각하고 화이팅!- 때문인지 괜히 제도 샤프의 머리 부분을 책상에 톡톡 쳐댔다. 넘겨 감독 선생님의 말과 함께 분주하게 시험지들이 팔랑이며 이동한다. 오늘 필적 확인란은 어떤 문장일지 기대하며 시험지를 펼치자 첫 페이지부터 시사에 관한 화작 문제가 나온다. 아 벌써 머리가 아프다. 첫 페이지부터 지문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니 오늘 시험은 전체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 머리를 짚으며 찬찬히 시험지의 지문을 훑어본다. 비문학 지문은 총체적 난국이다.-예술, 인문 그리고 끝판왕 과학까지- 이번에는 문학 작품을 훑는다. 또 큰일이다, 제시된 (가) ~ (다) 지문이 전부 고전시가이다. 후-. 한숨을 쉬며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

 

 

 

"국어 미친 거 아니야? 지문 난이도 왜 이래"

 

"아 그러니까, 이제 수능 올 9등급 예약이다"

 

"얘들아 내가 뒤에서 너희 깔아줄게"

 

"나랑 재수학원 끊으러 갈 사람, 선착 5명만 받는다"

 

"일단 나"

 

 

 

국어 시험만큼 시험이 끝난 교실 분위기도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는 거다. 안도하며 다음 시험공부를 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수학이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하는 수 없이 사물함에서 목베개와 담요를 가져와 책상에 엎어져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

 

 

 

"엎드린 사람 일어나고, 종 치면 시험 친다 알지?"

 

"네!"

 

 

눈 뜨고 보니 감독 선생님이 또 바뀌어 있었다. 이번 감독 선생님은 3학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체육 선생님이다. 귀여울 정도로 바짝 긴장한 아이들을 보며 간간이 농담을 하는데 자존심 상하게 웃기다. 씰룩이는 입꼬리를 붙잡고 눈앞에 놓인 시험지를 본다. '제2교시 수학 영역' ​타이틀만 봤는데도 눈앞이 깜깜하다. 1학년 때는 3페이지 정도는 술술 풀었던 것 같은데 웬 수열이며 미적이며 이딴 것들​을 배우고 나니 맨 앞 1장 푸는 것도 이젠 힘겹다. 오늘은 어떤 신선한 문제로 나한테 빅엿을 선물할지 궁금하다.

 

 

 

"미친."

 

 

 

이러면 안 되지만 서술형 문제를 본 순간 입 밖으로 1육담을 뱉어버렸다. 안타깝게 이번 시험도 50점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자 이제 수학까지 깔끔하게 말아버렸으니 남은 것은 영어, 탐구, 한국사인데 문제는 영어 듣기였다. 모의고사를 치는 날 대부분이 그렇듯 학교에서는 점심으로 특식이 나온다. 3학년 특혜로 가장 먼저 달려나가 한 판을 해치우고 졸랑졸랑 아주머니께 더 달라고 애교를 부려 받아낸 한 판을 뱃속으로 또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영어 듣기 평가를 시작할 즈음에 딱 맞춰 식곤증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정신을 놓으면 순식간에 두 문제를 날리게 된다. 오늘도 똑같은 역사가 반복될 듯하다.

 

 

 

***

 

 

 

내 예상은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결국 듣기 평가에서 한 문제를 놓치고는 뒷부분으로 갈수록 정신이 흐릿해져 거의 졸면서 문제를 풀었다. 이렇게 지금까지 친 과목은 3개, 지금까지 망친 과목 역시 3개; 이하 3판 3패였다. 이제 희망을 걸어야 하는 건 탐구와 한국사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한국지리가 끌린다. 매일 골랐던 일반사회와 생윤 대신 오늘은 완전히 새롭게 한지와 윤사를 골라본다. -역시 망한 듯하다.-

 

 

.

 

 


 

 


"책상 위에 있는 거 다 집어넣어"

 

 

 

문을 엶과 동시에 말을 하며 교탁까지 걸어오는 게 꼭 누구 생각이 난다. 이제 기대를 걸어야 할 과목으로는 한국사 딱 하나 남았다. 현재 스코어 5판 5패, 결과가 참혹하다. 제발 한국사만큼은 잘 치게 해주세요-. 안 믿는 신을 사심 채우는데 이용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기댈 곳은 신밖에 없었다. 책상 밑 무릎 위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린 후 심호흡을 하고 시험지를 펼쳤다. 아 이번 시간은 예감이 좋다.

 

 

 

****

 

 

 

 

시험이 끝난 후 반장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우선 거둬간 휴대폰을 모아둔 가방과 1년의 성적이 기록될 가채점 표를 챙기고 36인분 답지를 나눠줘야 했다. 이 많은 것들을 오롯이 반장인 나 혼자 해내야 하다니, 나름 여고생인데 이런 모습을 보아 우리 학교만 독보적으로 양성평등을 실천하는 듯했다. 한 손으로는 휴대폰 가방을, 다른 손으로는 72장 분량의 종이를 들고 겨우 중앙홀까지 이동했는데 지나가던 같은 반 친구가 이 모습을 보고는 경악한다.

 

 

 

"같이 가자고 하지, 이 무거운 걸 혼자 들고 왔어 바보야?"

 

 

 

참나, 들어줄 거면 들어주지 괜히 툴툴거린다. 감동한 마음을 슬쩍 비추자 친구의 얼굴이 붉어지며 마구 소리를 지른다.

 

 

 

"징그러워! 너 혼자 다 들어"

 

 

 

친구라는 말은 취소다.

 

 

 

*****

 

 

 

"얘들아 가채점 표 다 작성했으면 앞으로 내고, 저녁은 6시부터 먹으면 돼."

 

"와 진짜 고3이라고 너무하다. 어떻게 모의고사 날까지 11시 자습을 시켜"

 

"인정, 봉기 일으키고 싶다."

 

"대자보라도 붙일래?"

 

"4절지 사러 가자"

 

"ㅋㅋㅋㅋㅋㅋㅋㅋ보드마카로 쓰자"

 

 

 

그래, 고3.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듯 대한민국은 고3이라는 이유로 제한되는 게 너무나 많다. 어떻게 시험 친 날까지 11시 자습을 시키는 건지, 적어도 1시간은 줄여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가채점 표를 번호순으로 정리하고 교무실로 가려는데 이성경이 손목을 붙잡는다.

 

 

 

 

"어디 가?"

 

"이거 내러 교무실"

 

 

 

눈앞에 뭉쳐놓은 가채점 표를 흔들어 보이니 잔뜩 인상을 쓰며 ​아 망했다. 첫 시험부터 상담각-. 혼잣말을 한다. 학원 가기 전 교무실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성큼성큼 중앙 홀로 걸어간다.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데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남주혁이 고백했어."

 

"뭐?"

 

 

 

36장의 종이가 볼품없이 바닥으로 흩뿌려진다. 번호순으로 정리하느라 5분이나 걸렸는데, 한숨을 쉬며 주섬주섬 종이를 끌어모은 뒤 수를 확인한다.-36장 맞았고, 몇 장 빼고는 다행히 번호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종이를 다시 들고일어나 갑작스러운 통보에 대한 대답을 한다.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고는 나 어떡해에- 하고 말꼬리를 늘리면서 어깨에 10cm 넘는-내가 더 작다- 어깨에 기대온다.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허공에서 휘적댄다. 기대는 건 포기하고 빨리 해결책이나 내놓으라고 재촉하지만 안타깝게 나는 도움을 줄 수 없다.

 

 

 

"좋으면 좋은 거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똑같은 말 아니야?"

 

"달라"

 

"아무튼 나 어떡해?"

 

"네가 남주혁 좋아하면 사귀면 되지"

 

"아 …. "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말아줘"

 

"그래, 오늘 안으로 답해줘야 하는데 뭐라고 말해"

 

"알겠다고 해. 아니면 응이라고 하던가"

 

"… …"

 

"그래"

 

 

 

조언을 해 줘도 난리다. 안봐도 뻔하지, 내일 아침 페이스북에 '남주혁 님과 연애 중♥'이라고 올라올 것 같다. 그런 끔찍한 모습을 보기 전에 휴대폰을 자제해야겠다. 이성경이 하는 말은 한 귀로 흘려들은 채 교무실까지 도착해 손을 흔들어 준다. 지금 흔드는 손은 '입닫고 내일 보자. 어서 사라져' 라는 의미다.

 

"잘 가"

 

"일단 오늘 학원 갔다 와서 후기 들려줌. 안녕"

 

"제발 가줘"

 

 

 

가방끈을 부여잡고 후다닥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운동을 하는 아이여서 그런지 순식간에 복도 끝으로 사라진다. 도로록 조심스럽게 교무실 문을 열고 담임선생님의 책상을 찾아갔는데 저녁을 드시러 가셨는지 비어있다. 가채점 표를 올려두고 나오려는데 구석에서 변백현 선생님이 숟가락으로 머그잔을 휘휘 저으며 나오신다.

 

 

 

 

 

"한국사 몇 점?"

 

"저 한국사만 대박 쳤어요"

 

"그래서 몇 점"

 

"50점!"

 

"잘했네, 저녁은 먹었고?"

 

"아직이요. 아직 시간 남아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갈려고요"

 

"그래. 잘했네, 이리 와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한 입 호록하고 마시더니 대뜸 몇 점이냐고 묻는다. 자신 있게 50점!이라고 생글 웃으며 대답하니 아주 잠시 스쳐가듯 칭찬해준다. 나 지금 칭찬받은 거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이리 오라며 앞장서 걸어가는 선생님의 뒤에서 혼자 쿵쾅대며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깃발에 나오는 구절이다.' 춤을 추고 있는데 자꾸 이런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만 뒤돌아보신다. 하던 일 제발 그대로 하지 왜 자꾸 돌아보는지 모르겠다.

 

 

 

 

"너는 저번부터 왜 자꾸 혼자 이상한 짓 하니?"

 

"...!"

 

"그것도 내가 다른데 보고 있을 때만"

 

"… 칭찬받은 게 기뻐서 혼자 춤추고 있었는데 또 걸려버렸네요"

 

"못 말린다 진짜. 여고생들 원래 이러니?"

 

"대부분은 그런 편이죠"

 

"너만 그런 건 아니고?"

 

"제 친구들은 다 그래요"

 

"아무튼 한국사 만점 받았으니까 선물."

 

"젤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그거 딸기맛이 제일 맛있어"

 

"감사합니다"

 

"저녁 먹고 나서 먹어. 입맛 없어진다"

 

"네- 안녕히 계세요"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선생님이 건넨 것은 오목조목 작은 곰 모양 젤리들이 들어있는 하X보였다. 나도 빨간색 딸기맛 제일 좋아하는데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선생님 귀여워ㅡ, 매일 인상만 쓰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젤리도 먹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젤리는 소중하니까 작아서 들어가지도 않는 마이 주머니에 꾸깃꾸깃 집어넣으며 반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에게 달려간다.

 

 

 

******

 

 

 

1,2학년들이 시험 망했다!를 연발하며 모조리 빠져나간 학교는 3학년 층만 밝은 빛을 내며 조용히 가라앉았다. 저녁을 먹고 나오자 제법 어둑해져 있었다. 소화도 시킬 겸 얼마 전 학교 안에 새로 길을 낸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이곳이 우리 학교의 새로운 핫플레이스인 듯하다. 많은 아이들이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리는 벚나무 앞에서 제각각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며 그것들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흰색에 가까운 꽃봉오리가 예쁘다.

 

 

자습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자 하나둘 교실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친구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곧 예쁘게 꽃을 피워낼 작은 봉오리들을 바라본다.

 

 

 

 

 

"안 들어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검은색 나이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온 선생님이 보였다. 그제야 주위를 보자 언제 깜깜해졌는지 하늘이 어둡게 내려 가로등까지 켜져있었다. 달빛도 은은하고 하얗게 빛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투명하게 속이 비친 꽃봉오리가 만개하고 참 낭만적이다.

 

 

 

"낭만을 즐기는 중이에요."

 

"자습해야지 고3"

 

"아 선생님-. 이럴 때아니면 언제 구경하겠어요. 올해는 꽃도 못 보러 갈 텐데"

 

"좋은 대학 가면 매일 볼 수 있어, 어서 들어가"

 

"선생님은 안 들어가세요?"

 

"난 좀 걷다가 가려고"

 

"아-. 알겠습니다. 가볼게요"

 

"그래"

 

 

 

 

뒤돌아가는 선생님을 보다가 교실을 향해 발을 딛는다. 봄이 성큼 다가와서인지 괜히 마음이 울렁거린다.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살랑살랑 가벼워진 게, 봄 병인가 보다.

 

 

 

+)

 

 

그날 저녁 백현쌤 프로필 사진

 

 

 

변백현

 

예쁘나?

 

 

-


'STORY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현]한국사 변선생님 04  (0) 2017.05.07
[백현]한국사 변선생님 02  (0) 2017.05.07
[백현]한국사 변선생님 01  (0) 2017.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