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미스틱

 

한국사 변선생님_04

 

***

 

주말 자습을 끝내고 온 저녁에 쓰러지듯 잠에 빠져있다 방금 전에야 일어났다. 독서실에 가자는 이성경의 문자가 와 있었지만 만나면 자신이 어떻게 남주혁을 만났는지부터 고백한 날을 육하원칙에 맞춰 이야기를 풀어낼게 뻔히 보여 정중하게 답장을 보낸다.

 

 

「ㄴㄴ도서관 갈 거임 남친이랑 가」

 

 

침대에서 뭉그적대다 창틀에 얼굴을 올리고 밖을 쳐다본다. 창문을 열자 태양이 갑자기 와르르하고 빛을 쏟아내는 바람에 눈앞이 일렁인다. 적당히 차가운 공기에 적당히 따뜻한 햇볕이 참 마음에 드는 날씨이었지만 안타깝게 오늘은 도서관에 갈 예정이었다. 추위에 온도가 낮아진 몸이 어서 창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질끈 묶고 도서관에 갈 준비를 시작한다.

 

*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기도 했고 시험 3주 전이라 그런지 주말 도서관은 자비 없이 꽉 차 있었다. 교과서로 가득 채운 가방을 고쳐 메고 자료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

 

 

"진짜 많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복도를 걷는데 멀리서부터 사람이 많은 게 보인다. 습관처럼 가방끈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사람 사람 사람, 넓은 도서관이 온통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제 막 포기하고 독서실에 가겠다고 이성경한테 문자를 보내려는데 딱 자리를 발견했다. 뭐든 항상 그만두려 하면 이루어진다, 치사하게 빨리 좀 찾아오지 말이다. 내가 찾은 건 빽빽하게 찬 사람들 사이에서 자리를 떠나려는 사람과 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 …."

 

뭐가 잘 안 풀리는 건지 빨간 입술을 쭉 내밀곤 삐죽댄다. 선생님은 앞자리 사람이 바뀌든 말든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타자를 쳤다가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또 한참 가만히 있다가 다시 타자를 친다. 선생님을 아는척할까 했는데 민망할 것 같기도 해서 조용히 가방에서 문학책과 필통, 그리고 학생들의 기본 템인 포스트잇을 꺼낸다.

 

 

 

 

"… …."

 

 

선생님이 앞으로 밀려나온 커피캔을 이리저리 돌려보곤 작게 웃는다. 커피 캔에는 내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색, 사이즈의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쪽지와 커피를 보낸 사람을 쳐다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학생들 안 마주치려고 멀리 왔더니 딱 걸렸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선생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공부하러 왔지."

 

"지금도 하기 싫은데 선생님 대단하세요. "

 

 

 

그러니까 열심히 해,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며 머리를 꾹 눌러 책을 보게 한 뒤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지루하게 문학책만 쳐다보는데 방금 전과 같은 쪽지가 모서리에서부터 찔끔찔끔 내려온다. 말괄량이 같은 글씨체 아래 반듯하고 꾹 눌러쓴 듯한 글씨가 추가되어있다. 종이를 보고 선생님을 쳐다본다. 어쩐지 선생님의 목이 조금 빨개진 것 같다.

 

 

「집중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그러는데 번호 좀 주실래요?

 

→010-1234-5678 한국사 공부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나는 종이를 예쁘게 접어 체육복 주머니에 넣는다.

 

 

**

 

 

슬금슬금 밥 달라는 아우성이 들려오자 야쿠자 집단처럼-1인 10역이 가능한 덩치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매점으로 내려왔다. 방금 전 밥 먹으러 간다며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도망치듯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데 매점문을 열자 자리에서 새우탕을 드시고 있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점심 드시러 간다고 하셔서 10만 원짜리 런치 드시고 계실 줄 알았는데 1500원짜리 새우 탕이네요."

 

"시끄러워"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차림도 후줄근하다. 깨끗한 흰색 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학교에서는 잘 끼지도 않는 검은색 안경까지 꼈다. 이렇게 보니까 3년 전 공부할 거라며 배를 긁던 오빠가 생각난다. 물론 선생님은 저렇게 입어도 멋있긴 하다. 잘생겼으니까. 선반에서 컵라면을 골라 계산하고 선생님 앞자리에 앉으니 자신의 라면을 더 가깝게 붙인다.

 

 

"안 뺏어 먹어요"

 

"시끄러워, 아는 척하지 마. 저리 가"

 

 

사실 새우탕이 조금 먹고 싶긴 했다. 애꿎은 새우탕 세 글자만 뚫어져라 쳐다보니 안쓰러웠는지 선생님이 그릇을 앞으로 들이민다.

 

 

"아 해."

 

"앗싸"

 

"한입만 줄 거야"

 

"감사합니다"

 

 

텍스트로 쓰니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은데 첫 번째의 저 "아 해"라는 어린아이 할 때 아해가 아니라 모음 아에이오우 중에 '아'를 하라는 뜻이다. 아무튼 선생님이 친히 젓가락으로 집어 식혀주고 먹여주기까지 한다. 꼭 공주님이 된 것 같다. 한껏 입안에 들어온 면을 씹으며 내 라면을 먹을 준비를 마친다.

 

 

"선생님, 날씨도 좋은데 점심 먹고 산책해요"

 

"공부해"

 

"이렇게 날이 좋은데"

 

"말 끝까지 해야지"

 

"요"

 

"까불어, 그럼 5분만 걸어"

 

"앗싸 빨리 먹을게요"

 

"천천히"

 

 

선생님은 화법이 독특한 것 같다. 알겠으면 알겠는 거지 꼭 아니라고 한 다음에 알겠다고 한다. 나는 먹던 라면을 정리하고 카운터에서 바나나우유 두 개를 계산한다. 빨대를 꽂아 선생님께 건네니 고맙다며 받아든다. 도서관 건물에서 벗어나 작게 마련된 공원을 산책하듯 걷는데 기분이 둥실 떠오른다. 날이 따뜻하게 풀리자 소풍 나온 가족들도 보이고 복슬복슬 하얗게 털이 자란 강아지가 깡깡대며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강아지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경로를 바꿔 우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강아지"

 

 

남들이 들으면 선생님이 강아지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잔뜩 들떠서 달려오는 강아지를 받아안자 멀리서 주인처럼 보이는 아이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품 안에서 숨을 고르는 아이를 쓰다듬어주는데 털이 비단 같다. 주인 아이가 참 부지런한가 보다. 한참 쳐다보며 쓰다듬어주다가 아이에게 건네주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선생님을 본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가있다. 귀여워 선생님-.

 

 

***

 

 

산책을 다녀온 후 공부를 하러 돌아왔는데 문학책을 보니까 졸음이 쏟아진다.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몇 번이고 붙잡다가 결국 팔을 포개어 엎드린다. 다음부터는 혼자 도서관에 오면 안 될 것 같다고 다짐하며 잠에 든다.

 

.

 

 

눈뜨고 보니 탁상시계가 벌써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도서관에 온 지 5시간이 넘었는데 이때까지 한 거라곤 문학 3작품 읽은 것과 라면 먹고 산책한 것 밖에 없다는 소리다. 갑자기 몰려오는 자괴감에 문학책을 집어넣고 한국사 책을 펼쳤다. 대충 보니 도서관에 사람들도 빠진 것 같고 선생님 공부도 끝나가는 것 같으니 조금 이따 공부를 도와달라고 해야겠다. 제일 먼저 교과서를 펼치고 문제집의 같은 단원과 필기하던 노트를 펼친다. 여기저기 삐죽대며 형광펜이 엇나가있는 게 부끄럽다. 오늘은 필기를 예쁘게 해야겠다. 지금은 일제에 대항한 민족들에 대해 공부하는 중인데 헷갈리는 게 너무 많다.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고, 이마를 짚으며 차근차근 암기하기 시작한다.

 

 

 

"그 부분 헷갈리지"

 

"아..!깜짝이야

 

...네, 다 같은 말 같아요"

 

"나도 그거 공부할 때 제일 힘들었어. 어쩔 수 없다, 그냥 외워"

 

"아..."

 

"옆으로 와 봐. 잘하고 있는지 보자"

 

 

 

또 친절하게 의자까지 끌어준다. 와르르 가방 안에 물건들을 쏟아 넣고 종종걸음으로 옆자리에 앉는다. 선생님이 필기한 노트를 가져가더니 몇 장 뒤적여보고는 깔끔하다고 칭찬해준다. 선생님은 시력이 많이 안 좋으셔서 안경을 끼시는 듯하다. 친구들은 내 글씨체에 이름까지 붙여줬다-말괄량이 글씨라고-. 멋쩍게 이마를 긁으며 감사합니다. 하자 이번에는 교과서를 뺏어가신다. 한국사 필기는 얼마나 빽빽한지 교과서 옆 귀퉁이가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아주 다채롭다.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듯 씩 웃더니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별표시를 짚는다.

 

"이거랑 이거는 외워야 해. 이 부분은 앞 페이지에 배경이 나와있으니까 보고"

 

 

이거 다른 사람이 보면 시험문제 유출로 잡혀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자신만 모르는 듯 문제를 줄줄 흘리던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멈춘다. 그리곤 한쪽 눈썹을 찍 올리고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한다.

 

"아, 비밀이야"

 

 

방금 전 신민회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던 선생님이 흘리듯이 '서술형 나오니까 외워' 라고 한 말이 생각난 모양이다. 비밀로 하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미심쩍은 듯 쳐다보고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오늘 아침으로 계란 프라이를 했는데 반숙이 되었다라던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털을 빗겨주는데 한 뭉치가 빠져나왔다 이런 말들 말이다. 강아지라는 말에 솔깃해 다시 묻자 무미건조하게 응하고 대답한다.

 

 

 

"…사진 보여줄까?"

 

"네!"

 

 

공부할 때보다 더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니 웃긴가 보다. 푸스스 웃으며 휴대폰의 사진첩을 찾아 보여주는데 아까 공원에서 본 아이와 같은 새하얀 털을 가졌고 조금 더 작은 몸집의 아이가 선생님의 가슴팍 위에서 잠든 사진이었다. 조그마한 얼굴에 눈코입이 어떻게 오목조목 모여있다. 감은 눈은 대충 그은 직선 같았고 코는 동글동글 까만 콩이 생각났다. 앙 다문 입술은 시옷자 모양이다. 사진을 확대했다가 축소했다가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뺏어가듯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다른 사진을 보여준다. 이번에 사진 속 그 아이는 분홍색 레이스핀으로 머리를 묶었고 귀 끝에 기른 털은 예쁘게 땋아져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항상 모니터 펫만 키운지 몇 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렇게 예쁜 강아지를 기르는 선생님이 부러워졌다. 나도 예쁘게 꾸며줄 수 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해줬어요?"

 

"아니, 집에 갔는데 누나가 저렇게 해놨어"

 

"선생님 누나 있으시구나"

 

"아… …. 비밀"

 

"되게 의외인 부분이 많은 것 같네요"

 

"나는 너희가 내 성격 나쁜 줄 아는 게 더 의외다. 나 밖에서 그런 소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맨날 인상 쓰고 화내고 생기부로 협박하니까 무서워하죠"

 

"노트북으로 나이스 들어갈 수 있는 거 알지"

 

"죄송합니다. 우리 학교에서 선생님이 제일 좋으신 분이세요"

 

"그래야지"

 

 

또, 또 생기부로 협박한다. 이쯤 되면 생활기록부를 쓰려고 교사가 된 것 같다. 선생님은 포슬포슬한 웃음을 흘리며 불쑥 휴대폰을 들이민다.

 

 

"볼래?"

 

"이게 뭐예요?"

 

"이름 부르면 어디서 쏙 튀어나오는 거 찍었어"

 

"볼래요!"

 

 

선생님과 나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휴대폰을 놓고 영상을 재생하는데 스피커로 강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나온다. 도서관 내에서 하는 방송인 줄 알고 주위 사람들이 두리번 거리다가 우리를 흘긴다. 둘 다 굳어서 뻣뻣하게 마주 보다 푸스스 하고 웃어버린다. 가방에서 하얀색 이어폰을 연결하고 한쪽씩 나눠끼자 선생님이 강아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강아지는 좋겠다 저런 목소리로 불러주니까

 

 

'또또야-'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자 어디선가 쏙 튀어나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카메라에 코를 박고 킁킁댄다. 정말 너무 귀여운데 도서관이라 차마 입 밖으로는 못 내고 주먹만 말아 쥔 채 영상을 본다. 누워서 손장난 치는 또또의 발바닥은 아직 색소가 덜 올라와 연한 분홍빛을 띠고 있다. 결국 입 밖으로 끙 하는 소리를 뱉자 선생님이 참지 못하고 웃는다. 민망한 마음에 허벅지만 퍽퍽 치는데 눈앞으로 휴대폰을 들이밀며 계속 강아지 사진을 보여준다. 계속 놀리는 선생님한테 참지 못하고 하지마쎄여! 하고 이상한 말투로 소리를 지르자 더 크게 웃는다. 나쁜 사람

 

"알겠어 ㅋㅋㅋㅋㅋ아 웃기네"

 

"아 진짜… 맨날 이상한 사람 만들고"

 

"너 때문에 공부 반도 못했어, 빨리 책임져"

 

"선생님도 저 공부 못하게 하셨거든요"

 

"잠깐만 시간이 왜 이래?"

 

"미친, 쌤 시간이 왜 이래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리고 미친이 뭐야 말 똑바로 해야지"

 

"이런 정신 나간… …."

 

"못 살아 진짜"

 

 

분명히 자고 일어나서 선생님이 줄줄 흘려주는 문제 받아먹고 강아지 사진 나눠본 것밖에 안 했는데-결국 놀았다는 소리- 벌써 6시가 다 되어간다. 이러면 이제… ….

 

 

"배고프다"

 

 

배가 고파질 시간이다. 도서관 마감시간까지 버티려면 지금 나가서 배를 채워야 남은 시간이라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선생님을 툭툭 치고 밥 먹으러 가자고 말하자 또 한번 웃는다. 볼수록 내가 알던 사람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나쁜 사람이지만 참 웃음이 헤픈 사람이다.-그리고 멋있다.-

 

 

"뭐 먹을래"

 

"아 고기 먹고 싶다."

 

"가자"

 

"저 돈 없어요! 지갑에 꼴랑 8천 원 있어요"

 

"내가 있잖아. 난 카드도 있고 현금도 있으니까 가자"

 

"아 얻어먹기 죄송한데"

 

"표정부터 바꾸고 말하지? 그리고 커피랑 바나나 우윳값이라고 생각해"

 

"커피는 1+1이었고 바나나우유는…피 같은 용돈이었으니까 감사하게 얻어먹을게요"

 

"많이 먹지 마"

 

"… …."

 

"장난이야"

 

 

도서관을 벗어나 아무 계획 없이 걷는데 한참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근처 고깃집에서 냄새가 풀풀 날려온다. 홀린 것처럼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치는 데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학생들인가?" 

 

"네? 아 저는… …."

 

"네 곧 있으면 시험이라서 같이 도서관 왔어요"

 

 

뻔뻔한 사람이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상차림을 준비하는 아주머니께 생글생글 웃기까지 한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의미 없이 입술을 쭉 내밀고는 다른 곳을 쳐다본다. 저거 방금 귀여운 척 한 건가? 독특한 사람이다.

 

"남학생이 붙임성도 있고 예뻐서 서비스 더 얹었어

 

용돈 털어서 온 걸 텐데 많이들 먹고 가.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

 

"감사합니다"

 

 

둘 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온 게 먹힌 듯하다. 선생님이 수트라도 차려입고 왔으면 아는 척 안 하려 했는데 너무 익숙한 패션이라 친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친해졌다- 불판 위로 생고기를 올리자 맛있는 소리가 난다. 언제 익을지 불판 위에 올라간 고기를 쳐다보는데 위에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 익겠다. "

 

"깜짝이야! 예고 좀 해주세요"

 

"3초 있다가 말 걸게, 이렇게?"

 

"네, 심장이 하루에 다섯 번은 떨어지는 것 같아요"

 

 

"잘생긴 내 얼굴 덕분에?"

 

"아 진짜!"

 

"알겠어 알겠어 ㅋㅋㅋㅋㅋ"

 

"빨리 잘라주세요. 고기 타는 것 같아요"

 

"아직 빨간데? 말 돌리네 반장"

 

"아 몰라요 제발… …."

 

"놀리는 거 재밌네"

 

 

이 사람, 사람 놀리는데 익숙한 것 같다. 내 친구였으면 벌써 맞았다 이 변백현아. 얼굴에서 푹푹 열이 올라오는 걸 보니 또 빨개진 모양이다. 더워서 그런 거라고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하니 이번에는 테이블 위로 와르르 쏟아져서는 끅끅댄다. 참나… 다 익은 고기를 골라 입안으로 쏙 집어넣는다. 한 번도 안 와본 집인데 고기가 맛있다. 앞으로 여기만 와야겠다.

 

 

"이모 계산이요ㅡ"

 

 

학생이라고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해버려서 현금 결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5만 원짜리 깨는 거 진짜 아까운데. 밖으로 나오며 가게 안에 있던 방향제를 칙칙 뿌리곤 선생님한테도 흔들어 보이자 뿌려줘ㅡ 하고는 양팔을 벌려 빙글빙글 돈다. 아직 덜 빠진 고기 냄새에 같은 방향 제향이 나니 묘한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고기 냄새 풀풀 풍기며 도서관에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민폐다.

 

 

"선생님, 우리 옷에서 고기 냄새나요"

 

"아… 그러면 짐 싸서 카페라도 갈래? 9시 전에 데려다줄게"

 

"그럼 오늘만 실례할게요"

 

 

 

선생님은 눈치가 참 빠른 것 같다. 근처에 카페에서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들떠 재촉하니 알겠다며 일부로 천천히 걷는다. 방방 뛰며 화를 내자 큭큭대며 달려온다. 자료실에서 최대한 빠르게 짐을 챙겨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하다. 오늘 한 공부라곤 문학 3작품, 한국사 반 단원 밖에 없다. 이번 시험은 잘 쳐야 하는데 큰일이다.

 

 

"저는 어…초코딸기 케이크 하나랑 아메리카노 주문할게요"

 

"캬라멜라떼까지 같이 계산해주세요"

 

"뭐 하시는 거예요!"

 

"바나나 우윳값"

 

 

케이크와 커피까지 딱 8000원을 채우고 돈을 건네려는데 선생님이 손으로 막고 카드를 건넨다. 그놈의 바나나 우윳값은 갚은 지가 언젠데 이러는지 모르겠다. 남한테 받아먹는 게 익숙지 않아 안절부절못하자 가만히 있으라며 혼낸다.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제법 무서운 모습이다. 나는 삐죽이며 자리를 찾아간다.

 

 

***

 

 

"아ㅡ 힘들다"

 

 

케이크를 푹푹 떠먹으며 공부한 지 한 시간이 넘어간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나는 심심하다. 기지개를 펴며 뭉친 근육을 푸는 척 선생님을 보는데 역시 노트북에 코를 박고 집중하고 있다.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하는 건지 쳐다도 안 본다. 아 심심해, 나는 팔을 뻗고 그 위에 머리를 올린 후 눈을 감는다.

 

.

 

"일어나, 가자"

 

 

미쳤다. 잠깐 눈 감는다고 했던 게 잠들었나 보다. 노트북의 전원을 끄며 팔을 툭툭 치는 선생님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방금 전 나는 선생님께 자는 모습을 하루 만에 2번을 보여줬다. 선생님 레드썬, 잊으시길 바랍니다. 민망함에 가방 속으로 물건들을 쑤셔 넣으며 빨리 나가자고 쿡쿡 찌른다. 방실방실 웃으며 왜- 집 가서 자게? 하고 놀려온다. 오늘 4천 번은 놀림당하는 것 같다. 나는 선생님에게 빨리 가자고 팔을 붙잡고는 가게 밖으로 나간다. 도서관에 차를 주차해놓았다는 말에 컴컴해진 밤을 배경으로 선생님과 걷는 길이 예뻤다. 이제 꽃 봉우리들이 하나둘씩 꽃들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바람이 불면 제법 꽃 냄새가 나기도 했다. 봄의 밤을 느끼며 후드집업 지퍼를 턱 밑까지 올린다. 두 번째 보는 선생님의 차를 단번에 찾아내 문 앞에 서있자 선생님이 멀리서 차 키로 잠금을 풀어준다. 정말로 멋있다. 트레이닝복이 저렇게 잘 어울리는 것도 멋있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회색 외제차를 운전하는 모습도 멋있다. 집과 도서관은 민망할 정도로 가까워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집 앞까지 도착했다. 나는 금방 도착해버려서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어… 안녕히 가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반장, 그리고 한국사 모르는 거 있으면 그 번호로 연락 주시고요"

 

"아 선생님 진짜!"

 

"ㅋㅋㅋㅋㅋㅋㅋ 어서 들어가, 걱정하시겠다"

 

"감사합니다. 내일 봬요"

 

"그래 들어가"

 

 

 

미친 건지 반장이라는 말이 애칭처럼 들린다. 그 다음으로는 도서관에서 커피와 함께 보낸 쪽지를 갖고 놀리는 말이 따라왔지만 아랑곳 않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멀어지는 회색 차가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다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선다.

 

 

epilogue1.]

 

 

​<<백현쌤

​도서관에서 번호 물어본 사람인데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ㅎㅎ

​오후 09:32 ​내일 봬요

 

안녕하세요 도서관에서 번호 준 사람인데요

오늘 커피랑 바나나우유 감사했습니다ㅎㅎ

내일 봬요. 숙제 꼭 해오시고 ​오후 0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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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미스틱

 

한국사 변선생님_03

 

***

 

 

3학년의 첫 모의고사 날이다. 고3 3월 모의고사 성적이 수능 성적과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시하지는 못하는지 다들 아침부터 분주하다. 3월의 바람은 이렇게나 좋은데 정작 우리들은 멸치처럼 그물 안에 빽빽이 갇혀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4층 높이의 창문에서 뛰어내려 미친 이처럼 봄을 느끼고 싶지만 사회적 일탈자로 낙인찍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한숨과 함께 컴퓨터용 사인펜과 검은색 제도 샤프를 꺼내 나란히 놓는다.

 

 

 

"모의고사 다들 한두 번 쳐본 거 아니지? 5분 전 입실 명심하고 학교 번호 헷갈리지 말고 잘 치자."

 

 

 

다정한 여선생님의 충고와 함께 자유시간을 갖게 된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괜히 문학책을 뒤적여 나올만한 지문을 찾아봤다. 떠밀려 읽게 된 작품은 나희덕 시인의 '땅끝'이었다. 작품은 시인 특유의 잔잔한 어투와 절망에 대한 역설적 희망이 단단하게 버무려져있는 내용이었다. 뭐, 평소에 나희덕 시인을 좋아하기도 했고-사실 대부분의 문학 작가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무튼 작품 하나를 읽고 나서부터는 지루해져서 엎어져있는 성경이의 옆자리에 앉아 종알댔다. 어제 남주혁 운동하는 모습 훔쳐본 이야기라든가 버스를 탔는데 바로 옆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남자가 잘생겼었다 와 같이 지극히도 일상적인 내용으로 말이다.

 

 

 

"책상 위 전부 치우고 맨 앞줄은 OMR 카드랑 문제지 다 나눠줄 때까지 넘기지 마. 시험 잘 쳐라"

 

 

 

입실 5분 전, 감독관 선생님이 시험지와 OMR 카드가 잔뜩 쌓인 서류봉투를 들고 교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우르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다들 자리에 찾아 앉고 맨 앞자리의 책상 위에는 하나둘 시험지들이 쌓여갔다. 원래 시험 칠 때 떠는 성격이 아닌데 아침에 듣고 온 소리-​시험 잘 치고 와 딸, 오늘 치는 시험이 수능이라 생각하고 화이팅!- 때문인지 괜히 제도 샤프의 머리 부분을 책상에 톡톡 쳐댔다. 넘겨 감독 선생님의 말과 함께 분주하게 시험지들이 팔랑이며 이동한다. 오늘 필적 확인란은 어떤 문장일지 기대하며 시험지를 펼치자 첫 페이지부터 시사에 관한 화작 문제가 나온다. 아 벌써 머리가 아프다. 첫 페이지부터 지문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니 오늘 시험은 전체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 머리를 짚으며 찬찬히 시험지의 지문을 훑어본다. 비문학 지문은 총체적 난국이다.-예술, 인문 그리고 끝판왕 과학까지- 이번에는 문학 작품을 훑는다. 또 큰일이다, 제시된 (가) ~ (다) 지문이 전부 고전시가이다. 후-. 한숨을 쉬며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

 

 

 

"국어 미친 거 아니야? 지문 난이도 왜 이래"

 

"아 그러니까, 이제 수능 올 9등급 예약이다"

 

"얘들아 내가 뒤에서 너희 깔아줄게"

 

"나랑 재수학원 끊으러 갈 사람, 선착 5명만 받는다"

 

"일단 나"

 

 

 

국어 시험만큼 시험이 끝난 교실 분위기도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는 거다. 안도하며 다음 시험공부를 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수학이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하는 수 없이 사물함에서 목베개와 담요를 가져와 책상에 엎어져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

 

 

 

"엎드린 사람 일어나고, 종 치면 시험 친다 알지?"

 

"네!"

 

 

눈 뜨고 보니 감독 선생님이 또 바뀌어 있었다. 이번 감독 선생님은 3학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체육 선생님이다. 귀여울 정도로 바짝 긴장한 아이들을 보며 간간이 농담을 하는데 자존심 상하게 웃기다. 씰룩이는 입꼬리를 붙잡고 눈앞에 놓인 시험지를 본다. '제2교시 수학 영역' ​타이틀만 봤는데도 눈앞이 깜깜하다. 1학년 때는 3페이지 정도는 술술 풀었던 것 같은데 웬 수열이며 미적이며 이딴 것들​을 배우고 나니 맨 앞 1장 푸는 것도 이젠 힘겹다. 오늘은 어떤 신선한 문제로 나한테 빅엿을 선물할지 궁금하다.

 

 

 

"미친."

 

 

 

이러면 안 되지만 서술형 문제를 본 순간 입 밖으로 1육담을 뱉어버렸다. 안타깝게 이번 시험도 50점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자 이제 수학까지 깔끔하게 말아버렸으니 남은 것은 영어, 탐구, 한국사인데 문제는 영어 듣기였다. 모의고사를 치는 날 대부분이 그렇듯 학교에서는 점심으로 특식이 나온다. 3학년 특혜로 가장 먼저 달려나가 한 판을 해치우고 졸랑졸랑 아주머니께 더 달라고 애교를 부려 받아낸 한 판을 뱃속으로 또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영어 듣기 평가를 시작할 즈음에 딱 맞춰 식곤증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정신을 놓으면 순식간에 두 문제를 날리게 된다. 오늘도 똑같은 역사가 반복될 듯하다.

 

 

 

***

 

 

 

내 예상은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결국 듣기 평가에서 한 문제를 놓치고는 뒷부분으로 갈수록 정신이 흐릿해져 거의 졸면서 문제를 풀었다. 이렇게 지금까지 친 과목은 3개, 지금까지 망친 과목 역시 3개; 이하 3판 3패였다. 이제 희망을 걸어야 하는 건 탐구와 한국사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한국지리가 끌린다. 매일 골랐던 일반사회와 생윤 대신 오늘은 완전히 새롭게 한지와 윤사를 골라본다. -역시 망한 듯하다.-

 

 

.

 

 


 

 


"책상 위에 있는 거 다 집어넣어"

 

 

 

문을 엶과 동시에 말을 하며 교탁까지 걸어오는 게 꼭 누구 생각이 난다. 이제 기대를 걸어야 할 과목으로는 한국사 딱 하나 남았다. 현재 스코어 5판 5패, 결과가 참혹하다. 제발 한국사만큼은 잘 치게 해주세요-. 안 믿는 신을 사심 채우는데 이용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기댈 곳은 신밖에 없었다. 책상 밑 무릎 위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린 후 심호흡을 하고 시험지를 펼쳤다. 아 이번 시간은 예감이 좋다.

 

 

 

****

 

 

 

 

시험이 끝난 후 반장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우선 거둬간 휴대폰을 모아둔 가방과 1년의 성적이 기록될 가채점 표를 챙기고 36인분 답지를 나눠줘야 했다. 이 많은 것들을 오롯이 반장인 나 혼자 해내야 하다니, 나름 여고생인데 이런 모습을 보아 우리 학교만 독보적으로 양성평등을 실천하는 듯했다. 한 손으로는 휴대폰 가방을, 다른 손으로는 72장 분량의 종이를 들고 겨우 중앙홀까지 이동했는데 지나가던 같은 반 친구가 이 모습을 보고는 경악한다.

 

 

 

"같이 가자고 하지, 이 무거운 걸 혼자 들고 왔어 바보야?"

 

 

 

참나, 들어줄 거면 들어주지 괜히 툴툴거린다. 감동한 마음을 슬쩍 비추자 친구의 얼굴이 붉어지며 마구 소리를 지른다.

 

 

 

"징그러워! 너 혼자 다 들어"

 

 

 

친구라는 말은 취소다.

 

 

 

*****

 

 

 

"얘들아 가채점 표 다 작성했으면 앞으로 내고, 저녁은 6시부터 먹으면 돼."

 

"와 진짜 고3이라고 너무하다. 어떻게 모의고사 날까지 11시 자습을 시켜"

 

"인정, 봉기 일으키고 싶다."

 

"대자보라도 붙일래?"

 

"4절지 사러 가자"

 

"ㅋㅋㅋㅋㅋㅋㅋㅋ보드마카로 쓰자"

 

 

 

그래, 고3.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듯 대한민국은 고3이라는 이유로 제한되는 게 너무나 많다. 어떻게 시험 친 날까지 11시 자습을 시키는 건지, 적어도 1시간은 줄여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가채점 표를 번호순으로 정리하고 교무실로 가려는데 이성경이 손목을 붙잡는다.

 

 

 

 

"어디 가?"

 

"이거 내러 교무실"

 

 

 

눈앞에 뭉쳐놓은 가채점 표를 흔들어 보이니 잔뜩 인상을 쓰며 ​아 망했다. 첫 시험부터 상담각-. 혼잣말을 한다. 학원 가기 전 교무실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성큼성큼 중앙 홀로 걸어간다.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데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남주혁이 고백했어."

 

"뭐?"

 

 

 

36장의 종이가 볼품없이 바닥으로 흩뿌려진다. 번호순으로 정리하느라 5분이나 걸렸는데, 한숨을 쉬며 주섬주섬 종이를 끌어모은 뒤 수를 확인한다.-36장 맞았고, 몇 장 빼고는 다행히 번호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종이를 다시 들고일어나 갑작스러운 통보에 대한 대답을 한다.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고는 나 어떡해에- 하고 말꼬리를 늘리면서 어깨에 10cm 넘는-내가 더 작다- 어깨에 기대온다.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허공에서 휘적댄다. 기대는 건 포기하고 빨리 해결책이나 내놓으라고 재촉하지만 안타깝게 나는 도움을 줄 수 없다.

 

 

 

"좋으면 좋은 거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똑같은 말 아니야?"

 

"달라"

 

"아무튼 나 어떡해?"

 

"네가 남주혁 좋아하면 사귀면 되지"

 

"아 …. "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말아줘"

 

"그래, 오늘 안으로 답해줘야 하는데 뭐라고 말해"

 

"알겠다고 해. 아니면 응이라고 하던가"

 

"… …"

 

"그래"

 

 

 

조언을 해 줘도 난리다. 안봐도 뻔하지, 내일 아침 페이스북에 '남주혁 님과 연애 중♥'이라고 올라올 것 같다. 그런 끔찍한 모습을 보기 전에 휴대폰을 자제해야겠다. 이성경이 하는 말은 한 귀로 흘려들은 채 교무실까지 도착해 손을 흔들어 준다. 지금 흔드는 손은 '입닫고 내일 보자. 어서 사라져' 라는 의미다.

 

"잘 가"

 

"일단 오늘 학원 갔다 와서 후기 들려줌. 안녕"

 

"제발 가줘"

 

 

 

가방끈을 부여잡고 후다닥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운동을 하는 아이여서 그런지 순식간에 복도 끝으로 사라진다. 도로록 조심스럽게 교무실 문을 열고 담임선생님의 책상을 찾아갔는데 저녁을 드시러 가셨는지 비어있다. 가채점 표를 올려두고 나오려는데 구석에서 변백현 선생님이 숟가락으로 머그잔을 휘휘 저으며 나오신다.

 

 

 

 

 

"한국사 몇 점?"

 

"저 한국사만 대박 쳤어요"

 

"그래서 몇 점"

 

"50점!"

 

"잘했네, 저녁은 먹었고?"

 

"아직이요. 아직 시간 남아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갈려고요"

 

"그래. 잘했네, 이리 와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한 입 호록하고 마시더니 대뜸 몇 점이냐고 묻는다. 자신 있게 50점!이라고 생글 웃으며 대답하니 아주 잠시 스쳐가듯 칭찬해준다. 나 지금 칭찬받은 거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이리 오라며 앞장서 걸어가는 선생님의 뒤에서 혼자 쿵쾅대며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깃발에 나오는 구절이다.' 춤을 추고 있는데 자꾸 이런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만 뒤돌아보신다. 하던 일 제발 그대로 하지 왜 자꾸 돌아보는지 모르겠다.

 

 

 

 

"너는 저번부터 왜 자꾸 혼자 이상한 짓 하니?"

 

"...!"

 

"그것도 내가 다른데 보고 있을 때만"

 

"… 칭찬받은 게 기뻐서 혼자 춤추고 있었는데 또 걸려버렸네요"

 

"못 말린다 진짜. 여고생들 원래 이러니?"

 

"대부분은 그런 편이죠"

 

"너만 그런 건 아니고?"

 

"제 친구들은 다 그래요"

 

"아무튼 한국사 만점 받았으니까 선물."

 

"젤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그거 딸기맛이 제일 맛있어"

 

"감사합니다"

 

"저녁 먹고 나서 먹어. 입맛 없어진다"

 

"네- 안녕히 계세요"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선생님이 건넨 것은 오목조목 작은 곰 모양 젤리들이 들어있는 하X보였다. 나도 빨간색 딸기맛 제일 좋아하는데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선생님 귀여워ㅡ, 매일 인상만 쓰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젤리도 먹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젤리는 소중하니까 작아서 들어가지도 않는 마이 주머니에 꾸깃꾸깃 집어넣으며 반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에게 달려간다.

 

 

 

******

 

 

 

1,2학년들이 시험 망했다!를 연발하며 모조리 빠져나간 학교는 3학년 층만 밝은 빛을 내며 조용히 가라앉았다. 저녁을 먹고 나오자 제법 어둑해져 있었다. 소화도 시킬 겸 얼마 전 학교 안에 새로 길을 낸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이곳이 우리 학교의 새로운 핫플레이스인 듯하다. 많은 아이들이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리는 벚나무 앞에서 제각각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며 그것들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흰색에 가까운 꽃봉오리가 예쁘다.

 

 

자습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자 하나둘 교실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친구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곧 예쁘게 꽃을 피워낼 작은 봉오리들을 바라본다.

 

 

 

 

 

"안 들어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검은색 나이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온 선생님이 보였다. 그제야 주위를 보자 언제 깜깜해졌는지 하늘이 어둡게 내려 가로등까지 켜져있었다. 달빛도 은은하고 하얗게 빛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투명하게 속이 비친 꽃봉오리가 만개하고 참 낭만적이다.

 

 

 

"낭만을 즐기는 중이에요."

 

"자습해야지 고3"

 

"아 선생님-. 이럴 때아니면 언제 구경하겠어요. 올해는 꽃도 못 보러 갈 텐데"

 

"좋은 대학 가면 매일 볼 수 있어, 어서 들어가"

 

"선생님은 안 들어가세요?"

 

"난 좀 걷다가 가려고"

 

"아-. 알겠습니다. 가볼게요"

 

"그래"

 

 

 

 

뒤돌아가는 선생님을 보다가 교실을 향해 발을 딛는다. 봄이 성큼 다가와서인지 괜히 마음이 울렁거린다.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살랑살랑 가벼워진 게, 봄 병인가 보다.

 

 

 

+)

 

 

그날 저녁 백현쌤 프로필 사진

 

 

 

변백현

 

예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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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이가 선생님이라면 이런 모습 아닐까효....)




W.미스틱




한국사_변선생님




***






한 학급의 대표가 되는 일은 고3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조용히 공부하고, 자습하고, 시험 치고 그렇게 1년을 보내다 졸업하려 했는데 반강제로 친구들이 후보 추천을 하는 바람에 답정너 수준으로 학급 투표가 진행되었다. 유난히 우리 학교만 반장을 많이 불러대는데 그게 번거로워서인지 섣불리 나서는 아이들이 없어 후보는 나 하나밖에 없었다. 반 배정 때 아는 친구들이 많아 기뻐했는데 이런 식으로 우정이 변질되다니, 속아버렸다. 후보가 한 명뿐인 이상 투표는 찬반으로 이루어졌는데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자포자기한 채로 하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함성을 질렀다.






뭐 반장 생활 일주일째인 지금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다. 오히려 쏟아지는 선생님들의 관심에 후보로 떠밀어준 친구들에게 고맙기까지 하다. 방금 전 쉬는 시간에도 문학 선생님이 유인물을 가져가라고 시킨 심부름을 하려고 교무실에 갔었다. 난 그저 '4반'이라 포스트잇에 적혀있는 36장짜리 종이 더미만 들고 가려 했는데 한국사 선생님이랑 눈이 마주쳐버렸다. 무시하고 가려 했지만 난 이미 찍혔기에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정직한 인사였다. 보통은 "쌤 안녕하세요" 거나 "안녕하세요"로 통하는데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니. 별거 아닌 것에 소름 돋아 뒤돌아 나오는데 선생님이 나를 부른다. 다른 선생님이 계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글생글 웃음까지 머금은 채로. 사실 처음 보는 것 같은 선생님의 웃음이라 어색하지만 함께 웃으며 돌아봤다.






"네?"




"이리 와봐"




"왜 부르셨어요"




"이것도 좀 갖고 가라고"




"아..."




"우리 반 알지? 애들 좀 나눠줘"






아니 이런 미친 사람이 다 있나. 5반도 분명 반장이 있다. 굳이 나를 찾아 시키다니 괜히 서러운 마음이 몰려온다.




.


.


.


그날 나는 60장이 훨씬 넘는 종잇 뭉치를 들고 두 층을 올라갔다.






×××






"반장 이거 나눠줘"




"뭐야 이거 네가 들고 온 거야? 수고했어"




"후.. 너네 담임 나한테 왜 이러냐"




"쌤이 너 좋아하나보지ㅋㅋㅋㅋ"




"미친.. 그런 사랑이라면 거절한다. 차라리 생기부 한 줄을 더 적어줘라"




"어후 아무튼 수고했다 야"




"그래, 열공하고"




"너도"






다행스럽게 옆반 반장은 참 다정했다. 거의 끌고 오다 싶이 종이를 들고 와 한 쪽팔을 두드리며 우리 반 아이들에게 문학 프린트를 나눠줬다. 공부에 미친 하이에나들은 종이를 받자마자 이름을 쓰고는 지워지지 않게 테이프로 한 겹 더 코팅한다. 사물함에서 문학책을 꺼내고 자연스럽게 이성경 옆자리에 앉으니 온 줄도 모르고 핸드폰만 쳐다본다. 전화 문자만 하면 된다면서 휴대폰은 폼으로만 갖고 다니던 아이가 하루 종일 실실거리면서 붙잡고 있는 걸 보니 남자가 생겼나보다.






"남자?"







"어? 아니 그냥 운동같이 하는 애"




"남자네"




"뭐래, 아무튼 변백현 진짜 또라이 아니냐?"




"그러니까. 말 돌리지 말고"




"진짜라니까"




"이름은? 잘생겼어? 키커?"




"아 잘생겼어 키도 크고. 이름은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우리 성경이 연애한다고 놀려야지"




"미친"






여자들 끼리의 대화라 설레발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키도 크고 잘생기고 운동까지 하는 남자라니, 19년의 공백을 그런 완벽한 사람으로 채운다는게 부러울 따름이었다.- 자식 키우는 마음으로 눈물 훔치는 척을 하니 꺄르르 대며 날 밀어버린다. 의자의 거의 끝부분까지 밀려나 넘어질 뻔했지만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자세를 고치고 앉는다.






×××






문학은 좋아하지만 선생님은 좋아하지 않는다. 작년부터 느껴온 거지만 선생님은 (수업만 안 하시면) 참 좋은 분이신데 수업은 왜 이리도 지루한지 모르겠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책상에 엎어지려다 시간표를 본다.




'한국사 : 변백현'




4교시가 한국사 시간이었다. 금요일 1교시 아니면 월요일 4교시라니 참 행복하다.








"아 한국사"







"오늘은 책 챙겼어?"




"저번에 엄청 혼나고 집 가서 바로 챙겼지"




"다행이다. 앞으로 잘 숨어 다녀, 괜히 걸렸다가 안 그래도 칙칙한 1년 더 우울하게 보내지 말고"




"그래야지. 너는 걔랑 연락 안 해? 남주혁."




"맞다, 얘 오늘 시합 때문에 우리 학교 온다는데 얼굴 보러 갈래?"




"걔가 시합인데 왜 우리 학교를 와"




"맞네, 왜 이래 얘?"




"좋아하네! 시합 가기 전에 네 얼굴 보려고 오는 거 아니야?"




"아 …. 미친 거 아니야? 나 지금 설레발쳐도 되는 거지"




"충분히"




"아니면 어떡해"




"아니면 아닌 거지"




" … …."



"난 책 가지러"








빠르면 다음 주부터 주말에 혼자 도서관에 가야 할 듯하다. … 그래 자발적 아웃사이더 좋지. 양 볼을 붙잡고 있는 성경이의 얼굴이 빨갛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사물함을 열어 한국사 책을 꺼내 온다.









"인사"




문을 열고 늘 그렇듯 걸어오며 말을 하는 선생님의 표정은 한결같이 ㅡㅡ 이런 모양이다.- 저것도 귀여운 편이다- 아무튼 더 늦었다가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서둘러 인사를 하려는데 또 늘 그래온 것처럼 말을 자른다.






"반장은 오늘 야자 끝나고 좀 남자"




"네?"




"… …."




"…. 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목소리들은 놀이공원에 온 것 마냥 명랑한데 나 혼자만 화장실 청소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거기다 오늘은 야자가 끝나고 잘생긴 수학 선생님의 '포인트만 쏙쏙 짚어주는 단.기.완.성.과외' 가 있는 날인데 비싼 과외비를 버리는 걸 본다면 엄마가 화낼 것 같다.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눈빛을 못 본척하며 고개를 숙인다.




.




악마변백현 답게 중간에 쉬거나 농담하는 일은 없었지만  변백현 선생님은 수업을 정말 잘 하신다-정신 차리고 들으면 잠 안 자고 수업 들은 보람이 있을 정도로-. 어쩌다 보니 선생님 찬양으로 넘어갔는데 아무튼 야자 끝나고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답답해져온다.






×××






"왔다 왔다 왔다"




"누구"




"남주혁!"




"아- 가자"







"나 얼굴 괜찮아?"




"응 제발 가자"



"후… 떨려"




"그냥 친구라며, 같이 운동하는 사이라며"




"네 말 듣고 나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어후… 가자"






학교에 오면 자거나 수업 듣거나 먹기만 하던 아이가 남자 하나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한참 동안 거울을 보다 전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손목을 낚아채고 정문으로 달려나간다. 거의 모든 학교가 그렇듯 우리 학교 역시 학교 안에 있어야 할 시간에 정문으로 나간 걸 경비아저씨께 걸리면 벌점이다-이름만 벌점이지 효력은 없다-.




"야, 나가면 걸,"




"안녕!"







"늦었다?"




"아 미안, 근데 웬일이냐? 오늘 학원 안 와?"
 


"가는 길에 잠깐 들렀지. 옆에는 …"




"아, 안녕? 나 그냥 얘 친구야"








선생님께 혼나도 될 것 같다.






×××






"야자 열심히 하고, 변백현 파이팅!"




"얼른 가라"







"수고해ㅡ"






이성경은 자습을 안 하는 대신 입시학원에 간다. 오늘은 성경이의 빈자리가 조금 쓸쓸하다. 오늘 같은 날-변백현한테 또 찍힌 날-은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고민 상담보다는 진로가 더 중요하니 사물함으로 가 2학년 때 놓아버린 미적1 문제집과 노트를 꺼내온다. 수학은 쳐다만 봐도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아 놓아버렸는데 작년 11월 모의고사 성적을 보니 충격적이어서 겨울방학부터 다시 시작했다. 죽을 맛이었지만 뭐 죽지 않았으니 할만하다는 거겠지.


 


 



 


근데 문제 진짜 안 풀린다.


 


 


 


 


어느새 노트에 공식 대신 혼잣말을 적고 있었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X됐다' , '집 갈래'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휴 정신 차려야지 고3이니까, 푸념처럼 늘어놓는 이야기인데 대한민국은 고3이라는 이유만으로 제한되는 게 너무 많다. 중3이나 고3이나 공부 안 하는 건 똑같은데 말이다. 나름 작게 쉰다고 한숨 쉬었는데 앞자리 아이의 신경을 건드렸나 보다. 하긴 한창 예민할 때다. 나도 오늘 아침에 엄마랑 별거 아닌 걸로 다투고 왔으니까.






*






미적1 반단원정도를 공부하니 어느새 자습 1부가 끝나있었다. 2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 교실에 있던 친구 아무나 데리고 매점으로 내려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다. 다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나 보다. 슬금슬금 사이를 파고들어 이모한테 비틀즈와 이온음료를 하나씩 달라고 말한 뒤 교복 마이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냈다. 거의 체육복이 교복일 만큼 입고 다니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후드티만 입으니까 추워서 마이를 걸쳐 입었을 뿐, 남보다 앞서 나가는 고3의 패션리더가 바로 나였다.




같이 따라온 친구는 숏다리를 씹고 나는 비틀즈를 입안에 톡톡 까넣고 있는데 계단으로 내려오는 변백현 선생님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




"야 괜찮아?"




"어? 어…"







"조금 이따가 보자. 도망가면…"




"네 선생님! 교무실로 가면 되는 건가요?"




"그래. 열심히 하고"






쿨내나는척..눈 동그랗게 뜨고 귀여운 척... 당황하지 않은 척.. 세상 가장 발랄한 소녀인 척... 을 하며 선생님께 손까지 들어 인사를 했다. 같이 있던 친구가 어깨를 때리면서 웃어젖힌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기까지 2시간이 조금 덜 남았지만 아직 왜 남으라고 하는지 이유는 모른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하며 친구와 얘기하면서 반으로 올라가자 타이밍 좋게 종이 울린다. 매점 쟁취에 실패한 여고생들이 올라가는 소리가 와다다 하고 몰려온다. 열심히 하겠다고 비틀즈도 사 왔는데 정작 2부가 되니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건 공부를 해뒀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것도 해둔 게 없어 무슨 공부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그나마 가장 흥미 있는 한국사와 문학책을 폈는데 미치겠다. 오늘 공부한 내용 말고 하나도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한국사 책을 펼쳐 그리다 만 연표를 만들기 시작한다.




×××




피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연표를 완성한 뒤 종 치기 30분 전부터 잤던 것 같다. 보통 그 시간쯤이면 슬금슬금 집에 갈 채비를 하는데 오늘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눈뜨고 보니 딱 좋게 종 치기 2분 전이어서 책상 안에 넣어놓은 거울을 꺼내 얼굴을 보는데 무슨 괴물이 한 마리 있다. 대학생 되면 매일 꾸미고 학교에 갈 거다. 지금은 고3이니까.-이것 역시 대한민국에서 통하는 주문이었다.- 대충 앞머리 정리와 눈곱만 떼고 질질 내려오는 머리는 그냥 하나로 묶어버렸다. 귀찮아서 확 자르고 싶은데 얼마 남지 않은 캠퍼스 생활에 긴 생머리를 찰랑대며 걷는 게 소원이기 때문에 남겨뒀다. 아무튼 가방을 다 메고 있는 친구들을 불러 상모돌리기! 하며 머리를 돌리자 꺄르르 하고 넘어간다. 가랑잎만 굴러가는 소리에도 웃는 소녀들이었다.






"반장 수고"




"그래 잘 가라"
 




상모돌리기는 괜히 한 것 같다. 짐을 챙겨 가방을 메고 교무실로 가면서 머리를 다시 묶는데 예쁘게 하려니까 더 안되는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자기 최면으로 '나는 지금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머리를 묶는 거다. 예쁘게 묶이지 않아도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니까 참… 예쁘게도 묶였다.






"선생님 …"
 





"왔어? 옆에 앉아, 교무실에 커피랑 녹차밖에 없는데"




"그럼 저는 커피 마실게요"




"믹스 괜찮지?"




"감사합니다"






요즘은 반장이 돼서 워낙 많은 선생님들과 얘기하다 보니 덜하지만 아직까지도 선생님이나 나이 많은 사람과 있으면 어색하다. 여고 특성상 발랄한 아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튼 연장자 앞에서는 쭈굴이가 되어버려서 어색한 상황이 펼쳐지곤 했다. 아…벌써부터 한숨만 나오려 한다.






"근데 저 왜 남기셨어요?"




"원래 반장들 남겨서 일시키려 했는데 다들 안된다고 해서, 넌 오늘 일 조금만 도와주고 놀다가 가자"




"ㅎ.. 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잘생긴 수학선생님 보러 가야 한다고 할 걸 그랬다. 도망간 반장들은 지금쯤 버스 타고 집에 가고 있겠지, 정말 한숨밖에 안 나온다.


 


 



 




"뭐 시키실 거예요?"




"그냥 옆에 앉아서 이거 4장씩 스테이플러로 찍어"




"이거 다요?"




"말 되게 많네, 그냥 30분까지만 해"




"근데 복사 맡기면 다 찍혀서 나오잖아요"




"고장이래"




"아… …."






스테이플러나 찍으라고 여고생을 10명이나 남기려 하셨나 보다. 10명이 나란히 앉아 스테이플러를 찍는 것도 웃긴 모양새였을 거다. 티 안 나게 한숨을 쉬며 차례대로 종이를 합쳐서 스테이플러로 찍어댄다. 좋았어 오늘의 무기는 너로 정했다! 속으로 멋진 대사를 날리며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선생님 눈치를 보고 팔을 앞으로 뻗어 멋있는 포즈를 취했다.









"뭐 하냐"




"에? 아… 헐"




"빨리해. 시간만 벌려고 하지 말고"




"ㅎㅎ..넵"






일이나 하시지 왜 고개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민망한 손을 거두며 다시 콩콩 스테이플러 심을 박는다.






*






"으- 선생님 시간 다 됐어요"




"수고했어"




"선생님 되게 귀여우시네요."




"그런 말 좀 들어"




"와 뻔뻔함까지"




"좀 맞춰주니까 까불지. 내가 이래 봬도 우리 학교에서 악마로 통하는 사람이야"




"...알고 계셨어요?"




"모를 리가 있나







내가 왜 악마지? 이렇게 착하게 생겼는데"




"자신감도 쩔고"




"죽는다"




"좀 웃고 다니세요! 아까 보니까 웃는 거 예쁘던데"







"내가 언제 웃었어"




"안 웃으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저 그냥 쌤이라고 부르면 안 돼요?"




"안돼"




"들어보세요, 선생님은 입을 세 번이나 움직여야 하는데 너무 비효율적이고 쓸데없이 에너지만 낭비하잖아요"




"입만 살았지? 안돼"




"쌤 되게 어려 보이시는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후… …. 얼마처럼 보이는데?"




"그런 거 물어보시면 곤란한데 …. 많으면 스물여덟..?"




"나 그것보다 어린데"




"알려주세요!"
 


"스물다섯"




"헐"




"뭐"




"대박"




"뭐가"




"제대했다고 치면, 거의 임용 한 번에 붙으신 거 아니에요?"




"왜 제대했다고 치는데"




"대부분 그러니까...?"




"아직 군대 안 갔는데"




"헐"




"넌 그 소리밖에 못해?"




"아니요! 의외네요 선생님"






약속한 30분이 되어 선생님을 슬쩍 부르자 노트북 위로 빼꼼 눈만 올라온다. 푸스스 웃으며 귀엽다고 말하자 뻔뻔하게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심취한 표정을 짓는다. 모두가 알던 선생님의 성격과 다른 부분이 많아 놀란와중에도 눈치없는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풀렸다.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언제 가실 거예요?"




"10분만"



"네…"
 




선생님이 업무를 보고 계실 동안 휴대폰을 켜 버스 정보를 알아보니 다행히 15분 뒤에 집으로 가는 버스가 한 대 남아있어서 번호를 기억한 뒤 밀려있던 카톡을 읽었다.




.


.


​수학쌤



​오늘 수업 안 오니?


앞으로는 연락 줘^^


.


.








아 생각해보니까 엄마한테만 대충 말하고 수학선생님께는 말씀을 못 드렸던 것 같다. 죄송하다고 답장을 드리고, 중간중간 조용히 하라고 이마도 몇 대 맞아가면서 친구들한테 온 카톡을 읽으며 킥킥대니 10분이 금방 흘러있었다.




"끝"
 


칼 같은 사람. 정말 10분을 맞춰서 업무를 끝내다니 대단한 사람이다.








"선생님도 집 가세요?"




"그러면 어딜 갈까"




"그렇죠, 선생님도 집으로…. 네! 안녕히 가세요"




"뭐 해, 데려다줄게"




"아니요! 5분만 기다리면 버스 와요"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버스를 탄다고? 위험하게?"




"맨날 타고 다녔던 건데 …"




"안돼, 오늘만 타고 가"




"… …. 네"






앗싸 버스비 굳었다.






*






"차가 좋네요 선생님"




"고맙다"




"… …. 이건 방향제에요? 차에서 좋은 냄새나요"




"그래"




"… …. 어… "




"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가지?"




"넵, 선생님 창문이 되게 부드럽게 내려가네요. 문도 막 위로 열리고 그런 거 아니에요?"




"… …. 후"




"넵!ㅎ"






처음 타 본 선생님의 차는 승차감이 좋았다. 소음도 안 나고 깨끗했고 차 안에 넣어둔 방향제 냄새도 좋았다. 학교와 집까지 거리가 멀어 가는길이 오래걸렸다. 나는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같은 시간 사이에 선생님은 지치신 것 같다. 선생님껜 죄송한 말이지만 이런 차라면 매일 타고 등교하고싶다.






"감사합니다-. 내일 봬요"







"가"




"안녕히 가세요!"






회색 승용차가 번쩍거리면서 아파트에서 멀어져 가는 걸 보고 나서야 공동현관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러다가 선생님이랑 전교에서 유일하게 친한 사람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하. 괜히 선생님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아 기분이 들뜬다. 평소 같았으면 대박! 대박! 을 외치며 몇 명없는 3학년 단체방에서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뜨렸겠지만 오늘있었던 시간들은 왠지 나만의 비밀로 하고 싶었다. 아, 내 영원한 동반자 이성경 빼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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